본문 바로가기
미국 취업

미국 스타트업 회사 - 취업에서 퇴사결심까지

by 보수동과학자 2021. 8. 22.

참조: 보수동 과학자의 배우자가 쓰는 글
- 정들었던 회사를 떠나 이직을 한 뒤 조금이나마 남아있는 기억을 정리하려고 쓰는 글-

졸업 이후 학교를 떠나 첫 직장은 스타트업 회사였다. 내가 근무했던 곳은 약 9년 전에 시카고 근교 대학의 스핀오프로 시작한 회사로 미국 내에 있는 수만 개의 스타트업 회사 중 하나이다. 화합물 (주로 기체/액체) 분리 및 저장에 쓰이는 물질 개발과 공정 개발을 위주로 하며 세계 각지에 있는 화학 회사나 반도체 회사들에서는 꽤나 알려져 있었다. R&D 위주의 사업적 특성 때문에 박사 출신이 거의 60퍼센트 이상이었고 pilot plant까지 있어 비교적 탄탄한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근처에 있는 초대형 기업인 Honeywell UOP에서 이직을 많이 와서 우리끼리는 UOP east campus라고 불렀다.

처음 회사와 커넥션을 만들게 된 것은 역시나 Linkedin을 통해서였다. 학교에서 박사 후 연구원을 하며 구직활동을 하던 중 회사 내의 talent acquisition lead가 연락이 와서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처음 인재개발팀에서 받은 Linkedin 메세지


타 회사와 마찬가지로, 인터뷰는 총 3단계로 진행되었다.

1차: 회사 인재개발팀과의 인터뷰 (30분, 기본정보 및 fit 확인)
2차: Hiring manager (VP)와 인터뷰 (1시간, 실무 관련 질문)
3차: 회사 디렉터, 동료 및 임원 인터뷰 (대부분 2인 1조로 30분-1시간, 이틀)

이런 전형적인 인터뷰 프로세스를 거쳐 오퍼 레터와 연봉 협상을 거쳐 또 한 번의 이사를 하고 입사를 하게 되었다. 후에 퇴사를 결심했을 때 VP한테 들은 이야기이지만, VP는 2차 인터뷰 때 이미 나를 채용하려고 마음을 먹었다고 했다. 반면 3차 인터뷰를 했을 때 몇몇 디렉터들은 나를 채용하는 것에 반대했다고. 가장 큰 이유는 "나이스한 성향인 것 같아 매니저 롤에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아서" 였다고 한다. 하지만 채용 결정권은 VP에게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의견을 그대로 밀어부쳤고, 결과적으로는 자신이 옳은 선택을 했었다고 회자했다. 그리고 한 마디 더 덧붙인 건 아시아 여자에 대한 그들의 편견을 깨 주어서 고맙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코멘트였다. 작고 연약해 보이는 아시아 여성이 강한 코어를 가지고 팀을 이끄는 리더십을 보여주었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사실 애초에 그들이 생각했던 것 처럼 내가 나이스한 성격은 아니었기 때문이었겠지.

대부분의 스타트업이 그러하듯, 스타트업 회사의 분위기는 일단 자유롭다 (혹은 자유로움을 표방한다). 회사 사무실 CEO의 책상 옆에 foosball table (아래 사진)이 있고 근무 중에도 게임 한 판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직원들이 꽤 있었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지 않던 시절 금요일에는 세시부터 직원들이 사무실에 삼삼오오 둘러앉아 맥주를 마시고 네시쯤 퇴근하는 분위기였다.

Foosball table - 미국 영화나 동네 펍에서나 볼 수 있던 테이블이 내 사무실 책상 바로 뒤에 있었다.


또 하나 독특했던 점은 회사에서 제공해 주는 랩탑이 맥북이었다는 점. 첫 날 책상 위에는 포장도 뜯지 않은 맥북과 트랙패드, 매직키보드, 마우스와 같은 애플 제품들이 가득 올라와 있어 내가 애플에 취직을 한 건가 잠시 착각을 할 정도였다.

다른 소규모 회사들과 마찬가지로, 외국인들을 위한 비자/영주권 스폰서를 하기에는 회사 규모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직원이 (90퍼센트 이상) 미국인 (혹은 이중국적자 및 영주권자) 이었다. 회사 내에서도 나와 같이 외국인 학생 비자 (F1-OPT)로 들어온 경우가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 HR 매니저와 같이 머리를 싸매면서 서류 작업을 했던 기억이 난다.

스타트업에서 근무하면서 가장 좋았던 점은 quick learner이자 multi-tasker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큰 회사에서는 실제로 노출되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리는 일들이 스타트업에서는 단기간에 일어난다. 내 손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일의 우선순위를 정해서 시간 분배를 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었다. 이직 인터뷰를 할 때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던 이야기이기도 했다.

동시에 이런 부분들 때문에 개인적으로 근무 중에 제일 고전했던 것은 역시 1) 거절하지 못하는 점, 2) 상사에게 힘들다고 말을 못하는 점이었다. 특히 많은 한국인들이 나와 같은 부분에서 고생을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토요일 밤 11시에도 보수동 과학자는 일을 하고 있다. 역시 한국인 유전자는 속이지 못한다.


미국에서는 show-off, 즉 내가 얼마나 일을 많이, 그리고 잘 했는지 드러내는 능력이 중요한데 겸손한 한국인들은 그러지를 못한다. 일이 주어지면 휴가 기간 중에도 일을 해야 직성이 풀린다. 하지만 명심해야 한다. 내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있는지는 내가 제일 잘 안다. 멀티 태스킹이 중요하더라도 내가 handle할 수 있는 양은 정해져있다. 혹시나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양 이상의 일이 들어왔을 때에는 정중하게 거절의 표시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의 홍수에 허우적거리게 될 확률이 높다 (미래의 나에게 하는 말).

일의 홍수에 빠지지 않게 조심하자

회사를 다니며 가장 중요한 skillset이라고 느낀 것은 커뮤니케이션 스킬이다. 원활한 소통 능력은 스타트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관련 지식은 필수적으로 뒷받침 되어야 하지만 얼마나 효율적으로 소통하는지는 어떻게 프로젝트를 이끌어 나가는지, 그리고 주변에서 어떤 평판을 받는지와 직결된다. 섣불리 예스맨이 되었다간 감당을 못할 정도로 일이 쏟아질 수도 있고, "쟤는 너무 거절을 못해"라는 평가를 받게 되기도 한다. 효율적인 커뮤니케이션으로 균형을 맞추는 것은 지역과 산업을 불문하고 중요한 능력인 것 같다.

스타트업에 근무하게 될 경우 직면하는 가장 큰 챌린지는 역시 "인력부족"이다. 내가 프로젝트 매니저임에도 불구하고 매니저 밑에 실무를 해 줄 직원이 없다. 결국 내가 실무도 하면서 나에게 리포트를 하고 내가 다시 임원에게 보고를 하게 된다. 제안서부터 예산 분배, risk assessment, hazard review, technical meeting (내부 미팅), 고객사와 미팅, 리소스 매니지먼트, 다시 실무까지 반복되는 구조이다. 물론 차기 펀딩 소스를 구하기 위한 새로운 제안서 작성도 병행해야 한다.

동료에게 받은 내 최애 스티커. "쓰레기를 버리지 (dump) 마시오"를 "멍청이 짓을 하지 (dumb) 마시오"로 언어유희한 게 너무 귀여웠다.


언뜻 대학원이랑 비슷한 업무일 것 같지만 미팅이 하루 일과의 반 정도를 차지해서 실무를 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하지만 실무를 진행하는 속도는 대학원에 비해 최소 서너배는 빠르게 진행해야 한다. 불가능해보이지만 시간을 최고 효율로 쓰면 가능하다. 같이 근무하는 직원들과 "지금 일 하는 속도로 대학원 때 일했으면 졸업할때 논문 20개는 거뜬히 썼겠다"라면서 자조적인 농담을 했던 기억도 난다. 그만큼 개인에게 할당된 일이 많고 단시간에 배우는 점도 많았다.

회사에서 배우는 일은 새로웠고 업무는 재미있었다. 같이 일하는 직원들도 좋은 사람들이었고 일하는 환경도 즐거웠다. 그런데도 퇴사를 결심했던 큰 이유는 내 커리어와 관련 산업의 성장성에 대한 고민이었다. 물론 공식 퇴사 사유는 가족에 관한 것이었지만.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내가 소속되었던 부서는 새로운 임원이 취임하면서 신설된 부서였고, 관련 분야 연구를 했고 실험경험이 있는 나를 고용하면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고 한다. 실제로 회사 내에서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경험이 없는 분야였다. 박사 연구를 하던 중에도 늘 가졌던 의문은 "이 분야가 내가 현직에 있는 동안 상용화가 가능할까?"라는 것이었는데 내가 도달한 결론은 no였다. 그렇다면 커리어 내내 small business를 벗어나기는 힘들 것 같았고 더 이상 늦어지면 점점 큰 회사를 경험할 기회가 줄어들 것 같아 이직을 결심했다. (어떻게 다시 취뽀를 하게 되었는가는 다른 포스팅에서 소개해야겠다)

결과적으로 나는 이직을 하면서 회사를 떠나기로 결심했고, 이제 회사에 말하는 일만 남았다. 이 과정이 사실 제일 괴로웠다. 하지만 절대 후회는 하지 않았다.